1점 차로 뒤진 북산고의 마지막 공격.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도, 코트 바닥을 튀기는 농구공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서태웅로부터 처음이자 마지막 패스를 받은 강백호는 슛동작을 취하며 무어라 말한다. 그러나 이 역시 음소거 됐다. 강백호의 손을 떠나 림으로 날아간 공은 버저비터(buzzer beater: 농구에서 경기 종료를 알리는 경보기, 즉 버저 소리가 울리는 동시에 선수가 날린 슛)였다. 일순간, 극장에도 정적이 흘렀다.
너무도 유명한 장면이다. 만화책에서는 이다음 장면을 양면을 할애해 강백호와 서태웅의 하이파이브로 연결한다. 2023년의 관객은 이 모습을 스크린을 통해 움직이는 그림으로 조우했다. 알던 게 새롭게 보이는 마법, 그건 연필 터치로 완성한 북산고 5인방이 컬러로 되살아나는 오프닝 장면부터 시작됐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감독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전국 제패를 꿈꾸는 북산고 농구부 5인방의 꿈과 열정, 도전을 그린 영화. 역대 스포츠 만화 누계 발행 부수(1억 7,000만 부) 1위, 스포츠 만화 권당 판매량 1위 오른 '기록적 성공'을 거둔 만화 '슬램덩크'를 원작으로 한다.
원작자인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1부 완결'이라는 말로 31권을 마무리한 탓에 지난 26년간 2부에 대한 요청이 끊임없었던 작품이다. 여러 버전의 만화책과 TV판 애니메이션이 나오긴 했지만 2부나 영화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2023년 원작자가 각본, 연출, 작화까지 담당한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베일을 벗었다.
영화는 국내에서 개봉 2주 만에 전국 100만 명을 동원했다.
2021년 개봉해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 편'이 100만 명을 넘기는데 소요된 시간은 6주였다. 업계에서는 200만 돌파도 시간문제로 보고 있다.
'노재팬(일본 불매운동)'도 '슬램덩크' 앞에서는 무용했다. 이 영화의 인기는 잘 만든 콘텐츠에 대한 대중의 화답으로 해석하기엔 부족하다. 영화가 원작인 만화보다 뛰어난 완성도를 갖췄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2시간 내외의 러닝타임 안에서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과감히 버리는 취사선택을 잘했다. 그러면서도 원작 팬들을 만족시켰고, 신규 관객까지 흡수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인기는 3040 관객이 주도하고 있다. CGV를 비롯한 3대 멀티플렉스의 예매 비율을 보면 3040 관객이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단, 남성에 한정한 인기가 아니다. 관객 성비는 남 59%, 여 41% 수준) 원작이 1990년대 만화인 만큼 이 시기에 초, 중, 고 시절을 보냈던 관객이 가장 뜨겁게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신드롬의 본체는 결국 '추억과의 재회'라고 설명할 수 있다. 1990년대를 만화 '슬램덩크'와 보낸 이들에겐 각자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추억과 향수를 소환해 낸 이 콘텐츠의 매력은 2023년에도 여전하다.
만화와 영화, 이렇게 달랐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주간 소년 점프'(슈에이샤)에서 연재된 만화 '슬램덩크'를 원작으로 한다.
단순 무식한 고등학교 1학년생 사쿠라기 하나미치(강백호)는 동급생 아카기 하루코(채소연)에게 첫눈에 반한다. "농구 좋아하세요?"라는 그녀의 말 한마디에 사쿠라기는 농구부의 문을 두드린다. 그곳에서 아카기의 오빠인 아카기 다케노리(채치수)와 아카기의 짝사랑 상대이자 자신의 라이벌이 될 루카가 가에데(서태웅)를 만난다. 처음엔 그저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 농구공을 잡았지만, 농구의 매력에 점차 빠져들게 된다.
원작에는 수많은 명승부가 등장한다. 영화화된 건 전국대회 32강전인 북산고와 산왕공고와의 경기지만 도내 경기인 해남, 능남, 상양전 역시 선수들의 피, 땀, 눈물이 뒤엉킨 명승부였다. 그러나 전국 최강인 산왕에 도전장을 내건 언더독 북산의 열정과 투혼만큼 영화적인 이야기는 없었다. 더욱이 산왕전은 단 한 번도 영상화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탁월한 선택이었다.
영화는 북산 대 산왕의 전, 후반부 경기를 통으로 보여주는 구성을 취하면서 플래시백으로 송태섭의 전사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원작 만화에서 강백호, 정대만, 서태웅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송태섭의 서사가 영화에서 비로소 채워졌다. 태섭에게 농구의 매력을 알려준 세 살 터울의 형 준섭이 있었고, 그의 죽음으로 인해 태섭과 태섭의 어머니 모두 깊은 상실감에 빠지게 된다. 그런 태섭의 결핍과 외로움을 채워준 것이 바로 농구였다.
형을 잃고, 엄마와 멀어진 태섭에게 농구공은 유일한 친구로 그려진다.
땅에서부터 골대까지의 높이는 3.05m. 높이의 스포츠인 농구에서 선수의 신체 능력 특히 키는 중요한 조건이다. 송태섭의 키는 일반인 남성치고도 작은 편인 168cm다. 그는 작은 키를 빠른 스피드와 화려한 드리블링, 폭넓은 시야로 극복하며 "농구는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하는 것이다"라는 앨런 아이버슨(NBA의 대표적인 단신 농구 스타)의 말을 몸소 보여준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인공이 강백호가 아닌 송태섭인 이유에 대해 이노우에 감독은 "원작을 그대로 똑같이 만드는 것이 싫어서 다시 '슬램덩크'를 한다면 새로운 관점으로 하고 싶었다"면서 "송태섭은 만화를 연재할 당시에도 서사를 더 그리고 싶은 캐릭터이기도 했다"라고 밝혔다. 앞서 감독은 '슬램덩크'의 외전인 '피어스'(1998)를 통해 송태섭과 이한나의 이야기를 한 차례 한 바 있다.
주인공을 송태섭으로 한 서사에 모든 관객이 만족했다고 볼 순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주연이 아닌 다른 인물에게 포커싱을 맞춘 이야기가 새롭기는 하지만 더 재밌는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고개를 끄덕이기 쉽지 않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 장면에서 송태섭의 과거사를 다룬 플래시백으로 넘어갈 때 극의 온도가 다소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결과이기도 하다.
물론 이노우에는 대중들이 사랑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도 놓치진 않았다.
성장 드라마인 '슬램덩크'에서 최고 인기 캐릭터는 문제아와 천재 사이를 오가는 풋내기 강백호다. 강백호는 산왕전에서 눈부신 투혼을 발휘하며 패배의 위기에 빠진 북산을 건져 올린다. 또한 부상으로 농구에 손을 뗐다가 방황 후 다시 돌아오는 '불꽃 남자' 정대만의 눈물겨운 이야기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감독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그래 내 이름은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와 같은 명대사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영화는 만화의 매력 요소들 중 생략한 것이 많다. 경기 해설이 아예 없고, 관객 리액션도 최소화했다. 그림과 활자로 읽을 때는 묘미로 다가오지만 영화로 처음 작품을 접하는 이들에게는 낯설게 다가올 수 있는 구성이다. 감독은 애독자만을 타깃으로 한 영화가 아닌, 입문자까지 끌어안을 안전한 선택을 했다.
시대도 세대도 초월한 '슬램덩크'의 매력, 현지화까지 완벽했다
만화 '슬램덩크'가 연재되던 시기(1990~1996)는 세계적으로 농구 열풍이 불 때다. 미국 NBA 농구팀 시카고 불스는 이 기간 동안 네 차례나 우승했다. 뿐만 아니라 마이클 조던, 데니스 로드맨, 찰스 바클리, 데이비드 로빈슨, 지 밀러, 앤퍼니 하더웨이, 샤닐 오닐, 그랜트 힐 등 스타 선수들이 연이어 등장해 농구 팬들에게 '시각적 쾌감'을 선사했다.
국내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중반은 야구보다 농구가 훨씬 큰 인기를 누리던 시기였다. 연세대와 고려대가 실업 최강 기아자동차를 위협하며 대학 농구 돌풍을 일으켰으며, TV에는 장동건, 심은하 주연의 농구 드라마 '마지막 승부'(1994)가 방영돼 그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슬램덩크'는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스포츠 만화의 한계를 극복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뛰어난 작화 실력은 스포츠 만화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경기의 생동감을 극대화했다. 경기 장면 구성과 캐릭터 디자인에 있어 가장 많은 영감을 받은 건 NBA 농구와 스타 선수들이다. 우선 당대 최고의 구단이었던 시카고 불스를 보며 북산고의 팀 이미지를 만들었다.
빨간 머리의 문제아 강백호는 '코트 위의 악동' 데니스 로드맨(시카고 불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서태웅은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시카고 불스), 북산의 정신적 지주인 채치수는 '뉴욕의 왕'으로 불렸던' 패트릭 유윙(뉴욕 닉스), '불꽃 남자' 정대만은 존 스탁스(뉴욕 닉스), 노력형 단신 가드 송태섭은 타이론 보그스(샬럿 호네츠)를 참고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외모는 물론이고 플레이를 그대로 본뜬 듯한 작화가 많기 때문에 한때 도용 논란이 일기도 했다.
만화 '슬램덩크'의 국내 열풍은 성공적인 현지화도 큰 역할을 했다.
한번 들어서는 입에 익지도 않고 거부감마저 들 수 있는 일본 이름 대신에 한국 이름으로 캐릭터 명을 바꾼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북산 5인방 강백호·서태웅·채치수·정대만·송태섭은 물론이고 능남의 윤대협·변덕규·황태산, 해남의 이정환·신준섭·전호장, 상양의 김수겸까지 외모와 캐릭터에 절묘하게 어우러진 한국 이름은 국내 독자들이 인물에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캐릭터 작명은 당시 대원씨아이 '소년챔프' 편집자였던 장정숙 이사(현 레드아이스 스튜디오 대표)가 담당했다. 이름에 대한 고민을 컸던 장 이사는 학창 시절 '백호기'라는 동창의 이름이 남자답고 멋지다고 생각했고, 이름 석 자 중 앞 두 글자를 따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성 강 씨를 붙였다. 이밖에 이름은 졸업앨범을 펼치고 캐릭터 성격과 어울릴 이름을 조합해 하나하나 만들어냈다. 해외 만화 캐릭터를 한국 이름으로 바꾼 것 중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자막판과 더빙판 모두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초기 비율은 8:2 정도였으나 더빙판에 대한 관객 요구가 높아지면 6:4까지 비율이 조정됐다. 보통의 애니메이션은 자막판의 선호가 압도적으로 높지만 이 작품의 경우 더빙판의 인기도 뜨겁다. 더빙판은 자막을 읽느라 시선을 분산하지 않아도 되고 오롯이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식 이름을 자막이 아닌 성우들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실패의 미학, '북산 엔딩'을 기억하며…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처음과 마지막이 가장 인상적이다.
마음 한편 박제된 한 장의 추억이 걸어 나오는 것 같은 연필 터치 오프닝과 만화책과 마찬가지로 대사를 없앤 마지막 1분의 연출에 관객은 웃고 울었다. 영화의 엔딩은 만화의 엔딩과 조금 다르다. 영화는 정우성과 송태섭의 미국 대학 농구 진출을 암시하는 쿠키 영상으로 막을 내린다. 어쩌면 송태섭의 자리에 서태웅이 있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노우에는 이 영화의 시작이 그러했듯 마침표도 송태섭으로 찍었다. 만화의 결말은 그 유명한 '북산 엔딩'이다. 난공불락의 산왕을 물리치고 3회전에 진출한 북산은 모든 힘을 전 경기에 쏟아버린 탓에 어이없이 패하고 만다. 작가는 경기 장면의 묘사도 없이 한 장의 사진과 몇 줄의 글로 이들의 도전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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